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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마사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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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지 마사노부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관동군 참모, 태평양 전쟁 당시 여러 전선에서 작전 참모로 활동했다. 말레이 전역, 싱가포르 화교 학살, 바탄 죽음의 행진, 과달카날 전역 등에서 그의 행적은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모두 받는다. 종전 후에는 도피 생활을 하다가 정계에 입문하여 중의원 의원과 참의원을 역임했지만, 1961년 라오스에서 실종되었다.

2. 어린 시절 및 군 경력

이시카와현 에누마군 히가시타테오쿠촌(현재의 가가시 야마나카 온천)에서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는 집안의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34]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에 매진하여 나고야 육군 유년학교와 육군 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24년 육군사관학교(36기)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은시계를 받았다. 이후 1931년에는 육군대학교(43기)를 3등으로 졸업하며 군도를 하사받는 등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었다. 육군대학교 동기로는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이 있었다.

육군대학교 졸업 후 보병 제7연대로 복귀했으나, 곧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귀국 후에는 참모본부에 배속되어 근무했으며[35], 이 시기부터 육군 내 통제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특히 경쟁 파벌이던 황도파의 쿠데타 시도를 저지하는 데 기여하며 도조 히데키,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 군부 실력자들의 후원을 얻게 되었다.

1934년에는 당시 육군사관학교 간사였던 도조 히데키의 추천으로 육사 본과 생도대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이는 육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장교로서는 이례적인 인사였으며, 당시 육사에 재학 중이던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에게 접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쓰지는 육사 재직 중 황도파 장교들의 쿠데타 계획을 탐지하고 이를 상부에 보고하여, 이후 육군사관학교 사건으로 알려진 황도파 숙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건은 2·26 사건으로 이어지는 군부 내 파벌 갈등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1936년 2·26 사건 이후 관동군 참모부로 자리를 옮겨 만주사변의 경과와 전술 분석 및 만주국 협화회 관련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시하라 간지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134]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선 확대를 주장하고, 이후 북지나 방면군관동군 등에서 작전 참모로 근무하며 군기 확립을 명분으로 강압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 시기 쓰지는 왕징웨이 정권 수립 공작에도 관여했다. 1939년에는 관동군 작전 참모로서 만주와 소련 국경 지역에서의 분쟁 발생 시 적극적인 군사력 사용을 용인하는 내용의 満ソ国境紛争処理要綱|만소 국경 분쟁 처리 요강일본어을 입안했는데, 이는 이후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 발발 및 확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32]

2. 1. 출생 및 유년 시절

이시카와현 에누마군 히가시타테오쿠촌(현재의 가가시 야마나카 온천)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기키치(亀吉)는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으며, 마을에서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이었다. 야마나카 고등 소학교를 졸업하고 어렵게 공부하여[34] 1918년, 나고야 육군 유년학교에 50명 중 24위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육군 중앙유년학교에 진학했으며, 이곳에서 니시 다케이치 등과 동기가 되었다.

유년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36기)에 입학했다. 예과 2년을 마친 뒤 사관후보생으로서 가나자와에 주둔하던 보병 제7연대에 6개월간 배속되었다. 본과 과정을 거쳐 1924년 7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유년학교와 마찬가지로 사관학교에서도 수석으로 졸업하여 천황이 하사하는 은시계를 받았다. 견습 사관으로 다시 보병 제7연대에 배속되었고, 3개월 뒤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27년 10월에 중위로 진급했으며, 1928년에는 육군대학교(43기)에 입학하여 1931년 11월에 졸업했다. 육군대학교 졸업 성적은 아마노 마사카즈(수석), 시마무라 노리야스(차석)에 이어 3등이었고, 이번에는 천황이 하사하는 군도를 받았다. 육군대학교 동기로는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이 있었다.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제7연대로 복귀한 직후,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했다. 쓰지는 제7연대가 소속된 제9사단의 제7연대 제2중대장으로 상하이에 출정하여 부상을 입었다. 이듬해 1932년 5월 상하이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부대가 일본으로 귀환한 후, 해행사(偕行社)에서 사단을 대표하여 전투 경험을 연설했고, 이를 계기로 신문에도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참모본부 제1부(편성반)에 배속되어 근무했다[35].

1934년까지 그는 통제파(統制派)의 일원으로서 일본 육군 내의 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경쟁 파벌인 황도파(皇道派)의 쿠데타 시도를 막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장군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도조 히데키와 장군이자 훗날 육군대신이 되는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2. 2. 육군사관학교 사건

1933년(쇼와 8년) 8월,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소좌로 진급한 쓰지 마사노부는 참모본부 제1부 제3과(작전과)에 소속되었다. 1934년(쇼와 9년) 8월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 생도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당시 육군사관학교 간사(부교장)였던 도조 히데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도조는 쓰지에게 "너는 머리가 좋지만, 군인으로서의 경험이 부족하다. 육사에서 훈련을 다시 받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쓰지는 덴포센조(덴포 연간에 태어난 육군사관학교 졸업생) 출신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육사 중대장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쓰지가 중대장을 맡은 제1중대에는 당시 육사 본과에 입학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스미노미야)이 배속되었다. 쓰지는 연병장에서 생도들과 함께 훈련하며 지도에 힘써 생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당시 육군 내부에서는 황도파와 통제파 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1932년(쇼와 7년)에 발생한 5·15 사건 이후, 군부 내에서는 국가 혁신을 목표로 하는 황도파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 쓰지가 중대장을 맡은 육사 본과 제1중대의 생도 중 일부는 황도파 장교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특히 무토 요이치(武藤与一) 후보생은 황도파의 핵심 인물인 무라나카 고지(村中孝次) 대위,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浅一) 1등 주계 등과 긴밀히 연락하고 있었다.

쓰지는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하고, 사관학교 생도들에게 황도파의 동향을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사토 가쓰로(佐藤勝朗) 후보생 등 몇몇 생도들은 이소베 아사이치, 니시다 미쓰기(西田税) 등을 방문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쓰지는 황도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쓰지는 이 정보를 즉시 참모본부의 가타쿠라 다다시(片倉衷) 소좌와 헌병사령부의 쓰카모토 마코토(塚本誠) 대위에게 보고했다. 또한 쓰지는 쓰카모토와 함께 육군차관 하시모토 도라노스케(橋本虎之助) 중장의 관사를 찾아가 용의자들을 즉시 체포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 사건은 육군사관학교 사건(十一月事件)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무라나카 고지 대위, 이소베 아사이치 1등 주계 등 황도파 장교들이 체포되었다. 사토 가쓰로 후보생을 포함한 육사 생도 5명은 퇴학 처분을 받았다. 쓰지 자신도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금고 30일의 처분을 받고 미토의 보병 제2연대 부속으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황도파와 통제파 간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1936년(쇼와 11년) 2·26 사건 발생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쓰지는 이 사건에서 황도파의 쿠데타 시도를 막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아, 통제파의 핵심 인물인 도조 히데키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2. 3. 관동군 시절과 노몬한 사건

1936년 4월, 2·26 사건 이후 쓰지는 가타쿠라 타다시 소좌의 알선으로 관동군 참모부로 자리를 옮겼다. 병참을 담당하는 제3과에 배속되어 만주사변의 경과와 전술을 상세히 분석했다. 만주국 협화회의 기본 이념을 구상하며 도쿄로 가 당시 참모본부 전쟁지도과장이던 이시하라 간지를 만났고, 그에게서 만주와 몽골에 대한 이념을 배웠다. 이 만남은 쓰지에게 큰 영향을 주어, 이후 평생 이시하라를 ‘도사님’(導師)이라 부르며 극진히 존경하게 되었다.[134] 같은 해 9월, 쓰지는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 겐키치 대장과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 중장의 이름으로 "만주 제국 협화회의 근본 정신"이라는 팸플릿을 작성해 발표했다. 이 팸플릿은 법적 근거 없이 협화회를 정부 지도 기관으로 규정하고 관동군 사령관을 "철인"으로 묘사하여 큰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만주국 총무청장 오오다치 시게오가 항의하며 사임했고, 관동군은 급히 팸플릿을 회수하는 소동을 겪었다.[38] 1937년 5월에는 만주 사변 후 펑톈 교외 사찰에 안치된 채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던 장쭤린의 장례를 협화회 명의로 치렀다.

같은 해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여 중화민국 국군(국민혁명군)과 지나 주둔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쓰지는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와 고급 참모 가타쿠라 타다시 등과 함께 전선 확대를 주장했다. 당시 작전 주임이던 이케다 스미히사 중좌에게 자신이 직접 폭격기에 탑승해 중국군을 폭격하겠다고 자청했으나, 이 독단적인 행동에 놀란 이케다가 "그런 짓을 하면 전투기로 네 비행기를 쏘아 떨어뜨리겠다"고 위협하여 단념시켰다. 7월 말에는 지나 주둔군으로 전출을 자청하여 8월에 신설된 북지나 방면군 제1과 참모가 되었다. 그곳에서 쓰지는 상하를 가리지 않고 군 규율 위반자나 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군인을 적발하여 처벌하는 등 군기 숙정에 힘썼고, 이로 인해 병사들과 일본인 거류민들 사이에서 "현대판 미토 고몬"(今様 水戸黄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왕징웨이 정권 수립을 위한 비밀 공작을 실행했다. 그러나 북지나 방면군 고급 참모였던 시모야마 다쿠마 대좌와 이전에 갈등을 겪었던 탓에, 11월에는 제5사단을 거쳐 다시 관동군 작전 참모로 자리를 옮겼다. 1938년 3월 소령으로 진급했다.

1939년 4월, 관동군 사령관 명의로 満ソ国境紛争処理要綱|만소 국경 분쟁 처리 요강일본어이 포고되었다. 이는 작전 참모였던 쓰지가 기안한 것으로, 국경선이 불분명한 지역에서는 "현지 사령관이 자주적으로 국경선을 인정시킬 것"이며, "충돌 발생 시 병력 수에 관계없이 반드시 승리하도록 싸울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쓰지는 "침략하지 않고 침략당하지 않는 것을 만주 방위의 근본으로 삼는다", "만약 침략당하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응징한다"는 등의 문구를 확대 해석하여 분쟁을 조장하는 데 이용했다.[32]

같은 해 5월 11일, 몽골 인민 공화국과 만주국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던 할하강 동쪽 지역에서 몽골군과 만주국 경비대 간의 소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쓰지는 훗날 자신의 저서 『노몬한』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막료 중에 노몬한의 지명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눈을 부릅뜨고, 확대경을 사용하여, 하이라르 남쪽 외몽골과의 경계 부근에서 겨우 노몬한의 지명을 찾아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분쟁 확대에 깊이 관여했던 그의 무책임함을 드러낸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이라얼에 주둔하던 제23사단은 앞서 언급된 '요강'에 따라 즉시 부대를 증파했고, 충돌은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로 확대되었다. 몽골을 사실상 위성국으로 두고 있던 소비에트 연방은 게오르기 주코프 Георгий Жуковru 중장을 제57군단장으로 임명하여 분쟁 지역에 파견했다. 관동군 사령부는 분쟁 확대를 결정하고 몽골의 톰스크 비행기지 폭격을 계획했다. 이를 감지한 도쿄의 참모본부전보로 작전 중지를 명령했지만, 쓰지는 소련 공군이 칸주르 사원과 하론 아르샨 부근을 월경 폭격했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탐스크 비행기지 폭격이 정당하다고 주장, 이 전보를 묵살하고 작전 속행을 알리는 답신을 보냈다. 이 답신 전보의 결재서에는 과장, 참모장, 군 사령관의 결재란에 모두 쓰지의 도장이 찍혀 있어, 그가 독단적으로 대리 서명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일본군 규정상 참모장과 사령관의 결재는 대리가 불가능했으며, 쓰지의 이러한 행동은 명백한 육군 형법 제37조의 '독단 및 월권'(擅権)죄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였다.[39]

분쟁은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군의 공세로 소련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8월 31일 일본군은 분쟁 지역에서 철수했다. 9월 16일, 일본과 소련 간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평화 교섭이 1939년 12월 7일부터 25일까지 소련령 치타에서, 다음 해인 1940년 1월 7일부터 30일까지 하얼빈에서 진행되었다. 1월 30일, 모든 교섭이 마무리되어 서명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소련과 몽골 대표단은 돌연 합의를 번복하고 귀국해버렸다. 이에 대해 당시 만주국 대표단의 보좌관이었던 기타가와 시로(北川四郎)는 처음에는 "러시아인은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분개했으나, 훗날 1978년 만주국 대표였던 가메야마 가즈(亀山一二)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쓰지가 백군 출신 러시아인들을 사주하여 소련 대표 보그다노프 소장과 몽골 대표 잠사롱(Джамсарон)을 암살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된 것이라고 증언했다.[40][135] 쓰지는 전후 "전쟁은 졌다고 느낀 사람이 지는 것이다", "외교 또한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라고 기록했다.[41]

쓰지의 월권과 잔혹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할힌골 전투에서 제23사단 수색대장 이치이 에이이치 중좌와 보병 제72연대장 사카이 미키오 대좌 등 분전했던 장교들에게 할복 자살을 강요했으며[136][42], 심지어 포로 교환으로 송환된 장교들에게도 자살을 강요했다.[137][43][44] 오타니 게이지로(大谷敬二郎) 역시 포로에서 귀환한 장병들에게 쓰지가 자결을 강요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증언했다.[45]

사건 수습 후, 할힌골 전투 패전의 책임을 지고 쓰지와 관동군 작전과 주임 참모였던 핫토리 다쿠시로 중좌는 각각 제11군 사령부 부속(한커우)과 보병 학교 부속 및 교육총감부 부속으로 좌천되었다.[46] 그러나 1940년 10월, 쓰지는 참모본부 작전반장으로 복귀했으며, 이듬해에는 작전과장으로 승진했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인 1941년 6월 24일에는 참모본부 부원으로 임명되어 다시 출세 가도를 달렸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만화 《무지갯빛 트로츠키》에서는 할힌골 전투를 계기로 쓰지가 일본과 소련 간의 전면전을 획책했으며, 이 사건 이전에 스승으로 모시던 이시하라 간지와 함께 대소련 전쟁 계획과 관련된 여러 음모를 꾸몄던 것으로 묘사된다.

3. 태평양 전쟁

1941년 개전 직전, 쓰지 마사노부는 타이완 제82부대 제2과 과장으로 근무하며 〈이것만 읽으면 전쟁에 이길 수 있다〉(これだけ読めば戦は勝てる)라는 소책자를 작성했다. 이 책자는 남방 작전의 구체적인 지침을 담아 이후 대본영을 통해 각 부대에 배포되었으나, 미군의 전력을 얕보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과거 할힌골 전투 당시 북진론을 주장했던 쓰지는 이 시기 남진론자로 입장을 바꾸었으며, 1941년 가을에는 미일 직접 회담을 통해 전쟁을 피하려 했던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을 폭탄으로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6] 이후 쓰지는 고노에와 대립하던 도조 히데키 수상에게 접근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참모본부 작전과 병참반장으로 복귀했다.[51] 이는 당시 작전과장 핫토리 다쿠시로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고, 쓰지의 복귀에 반대했던 전임 과장 도이 아키오는 좌천되었다. 쓰지는 미국 및 영국과의 전쟁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 중 하나였다.[9]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쓰지는 말레이 전역, 필리핀 전역, 뉴기니 전역, 과달카날 전역 등 주요 격전지에 참모 또는 작전 지도 명목으로 파견되어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작전 입안과 실행 과정에서 때로는 뛰어난 능력을 보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명령 계통을 무시하는 독단적인 행동,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작전 강행, 아군 및 적군 포로에 대한 잔혹 행위 연루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특히 싱가포르 화교 학살 사건과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의 역할은 그에게 큰 비판을 안겨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 참고)

과달카날 전투의 실패 이후 쓰지의 명성은 실추되었고, 1943년에는 중국 난징의 일본군 본부로 보내져 한동안 활동이 뜸했다. 이 시기 그는 장제스 정부 측 인사들과 접촉하며 강화 교섭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육군 수뇌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9]

1944년 중반, 쓰지는 버마 전선으로 이동하여 임팔 전투 패배 이후 중국군과 대치하던 제33군에 배속되었다.[9] 그는 납맹 등월 전투 등에 참전하며 열세 속에서도 지연전을 지휘했으나, 이로 인해 일본군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쓰지 자신도 작전 지휘 중 버마군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패전 직후 쓰지는 태국 방콕에서 종적을 감추고 도주하여 연합군의 전범 재판을 피했다.[12][139] 이 때문에 그가 연루된 여러 사건의 책임자들이 대신 처벌받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3. 1. 말레이 전역과 싱가포르 화교 학살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쓰지 마사노부는 말레이 전역에 참모로 파견되어 일본군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휘하에 배속되었다.[9] 그는 일본군 제5사단의 선두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며 적군 전차를 탈취하거나 적진에 돌입하는 등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138][52] 작전 참모로서의 본분을 잊고 일선에서 명령 계통을 무시하며 지휘하는 모습을 보이자[52], 야마시타 사령관은 쓰지를 "고집이 세고 잔재주에 능한, 국가의 큰일을 도모하기에는 부족한 소인배"라고 일기에 기록하며 그의 성격을 경계했다.[138][53] 쓰지는 야마시타의 성공적인 말라야 상륙과 싱가포르 공략 작전 계획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10]

쓰지는 이치카와 지대 1천 명을 태국군으로 변장시켜 돌파를 감행하는 작전에도 관여했으나 실패로 끝났다.[138] 또한 기원절, 천장절, 육군 기념일 등 특정 기념일에 맞춰 거점을 점령하려는 비현실적인 작전 계획을 세워 부대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138][54]

싱가포르 점령 이후, 일본군은 점령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화교들을 색출하여 대량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싱가포르 화교 학살 사건, 또는 숙청 작전).[11] 이 사건은 남경대학살과 달리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일본군의 잔학 행위로 평가받는다.[139] 당시 경비본부 촉탁이었던 시노자키 마모루는 이 학살 명령을 쓰지가 입안했다고 증언했다.[139] 쓰지와 아사에 시게하루가 학살 작전을 기안하고 야마시타 사령관이 결재했다는 견해가 있지만, 명확한 물증은 부족하다.[55][56] 그러나 현장에서는 쓰지가 "싱가포르 인구를 절반으로 만들 생각으로 하라"고 독려하는 등 학살을 강력하게 지휘했다는 증언이 다수 있다.[57][58][59] 학살 대상자 선별은 명확한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져 수많은 무고한 화교들이 희생되었다.[60] 현장 지휘관이었던 카와무라 사부로 등은 이러한 무분별한 학살에 반대하며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8][61][62]

전후 연합군에 의한 전범 재판에서 싱가포르 화교 학살 사건의 책임 소재 규명에 어려움이 있었다. 학살 명령을 내린 것으로 추정되는 야마시타는 필리핀에서 처형되었고[58],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지목된 쓰지는 패전 직후 방콕에서 종적을 감춰 재판을 피했다.[139][58] (쓰지는 이후 중국 국민당의 비호 아래 숨어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139]) 결국 학살에 반대했던 현장 지휘관 카와무라 사부로와 오이시 마사유키에게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139][58] 쓰지는 이들이 처형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139][63] 이후 쓰지는 카와무라의 유고집 『13계단을 오르다』에 서문을 썼는데, 이를 두고 무신경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64]

말레이 전역이 종료된 1942년 3월, 쓰지는 도쿄의 참모본부 작전과로 불려가 작전반장이 되었다.

3. 2. 필리핀 전역과 바탄 죽음의 행진

필리핀 전역을 담당하던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이끄는 제14군은 마닐라 점령 후 바탄 반도에 고립된 미군-필리핀 연합군을 추격했으나, 정글 환경과 정보 부족 등으로 공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대본영은 일부 참모를 교체하고 쓰지 마사노부를 전투 지도 명목으로 파견했다. 쓰지 파견 후 1942년 4월 3일 시작된 2차 총공격으로 4월 9일 미군-필리핀 연합군은 항복했고(에드워드 P. 킹 중장), 코레히도르 섬만 남게 되었다.

미군-필리핀 연합군이 항복한 후, 포로 이송 과정에서 "투항자를 일률적으로 사살하라"는 명령이 제65여단 사령부를 통해 각 부대에 전달되었다.[140][65] 이로 인해 일부 부대에서는 실제로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대본영은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으며, 혼마 마사하루 중장 역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당시 보병 제141연대장이었던 이마이 다케오는 전후 수기에서 제65여단 참모 마츠나가 바이이치 중좌로부터 전화로 해당 명령을 받았으며, 마츠나가 중좌는 쓰지가 구두로 명령을 전달하고 다녔다고 증언했다.[65] 가와구치 키요타케 소장 또한 쓰지에게 여러 차례 명령 철회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가와구치 소장은 전후 수년간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쓰지는 바탄 죽음의 행진 과정에서 포로들에 대한 잔혹한 학대와 무차별 살인을 조장했으며[12], 호세 아바드 산토스 필리핀 대법원장 처형을 명령하고, 당시 하원 의장이었던 마누엘 로하스의 처형을 시도하는 등 필리핀 정부 관리들의 처형에도 관여했다.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의 학대와 학살로 수많은 미군 포로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후 일본 전범 재판에서 이 사건의 책임자들이 기소되었지만, 정작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지목된 쓰지는 도주하여 재판을 피했다.[12] 반면, 사령관이었던 혼마 마사하루는 쓰지가 추진한 처형 명령 일부를 무사도 정신에 어긋난다며 무효화하기도 했으나[13], 더글러스 맥아더는 부하들의 잔학 행위에 대한 지휘 책임을 물어 혼마를 처형했다.[13][66] 쓰지의 명령을 따른 다른 일본군 관계자들도 기소되어 그중 일부는 처형되었다.[12]

3. 3. 과달카날 전역

과달카날 전역에서도 쓰지는 현장의 실정을 무시하고 무리한 공격을 강행했다.

1942년 말, 쓰지는 과달카날로 가서 10월 23일에서 24일에 걸쳐 진행된 마지막 대규모 일본군 공격을 계획하고 지휘했다.[9] 이 과정에서 쓰지는 현지 지휘관이었던 가와구치 키요타케 소장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쓰지는 참모본부 작전참모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가와구치 소장을 파면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 쓰지가 공격을 주장한 지점은 이미 가와구치가 한 차례 총공격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곳으로, 재차 공격해도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판단되었다. 더욱이, 해군의 작전 가능 시간(월령에 따라 야간에 함대가 섬 주변 해역에 진입할 수 있는 시간)에 총공격 일정을 맞추려다 보니 공격 준비 과정에 큰 무리가 따랐다. 병사들은 열대우림 속 험준한 길을 통해 이동해야 했고, 대포와 같은 중화기는 운반할 수 없어 소총에만 의존해 공격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작전 실패는 예견된 결과였지만, 쓰지는 전후 작전 실패의 책임을 가와구치에게 떠넘겼다. 그는 자신이 쓴 《과달카날》(ガダルカナル)이라는 책에서 가와구치를 'K 소장'(K少将)이라고 지칭하며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에 맞춰 사건을 기술했다.[142]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인기 작가이자 국회의원이 된 쓰지의 이러한 행위에 분노한 가와구치는 쓰지의 지역구인 이시카와현에서 직접 해명 강연회를 열었으나, 쓰지의 지지자들이 고함을 지르고 야유하는 등 소란을 피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143]

미군이 점령한 헨더슨 비행장에 대한 총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병사들은 당시 '작전의 신'(作戦の神様)으로 불리던 쓰지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공격 방법의 개선을 건의했다. 병사들은 쓰지가 즉시 정보를 전군에 전달하여 신속하게 대응책을 마련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쓰지는 자신의 동기였던 지휘관 다수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멍한 상태에 빠졌고, 신속한 대응을 취하지 못했다. 결국 쓰지는 과달카날 전역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전투 도중 구축함을 타고 후방으로 철수했다.

공격이 실패한 후, 쓰지는 직접 도쿄로 가서 추가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해군이 더 이상 작전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내린 결론을 받아들였고, 남은 병력의 철수를 권고했다. 이러한 솔직한 보고는 천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과달카날에서의 실패는 쓰지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9]

4. 종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시점에 쓰지 마사노부는 방콕에 있었다. 연합군의 일원인 영국군이 진주해 오자, 그는 전범으로 체포될 것을 우려하여 처음에는 자결을 생각했으나, 곧 생각을 바꿔 승려로 변장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144] 이 과정에서 1946년 태국 국왕 라마 8세의 의문사에 쓰지가 관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쓰지 본인은 당시 중국에 있었다고 기록하여 사실 관계가 불분명하다.[144]

중국에서는 과거의 인연 덕분에 중국 국민당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국방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144] 그러나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퇴하자 1948년 일본으로 비밀리에 귀국하여 잠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여러 곳을 전전하며 숨어 지냈고,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潜行三千里|잠행 삼천리일본어를 집필했다.[144]

1950년 전범 지정에서 해제되자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출간된 潜行三千里|잠행 삼천리일본어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85][9] 이를 계기로 쓰지는 구 군부 인맥을 활용해 정계에 진출, 1952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고[15] 이후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참의원 의원까지 지냈다.[9] 정치인 시절에는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가말 압델 나세르,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저우언라이, 자와할랄 네루 등 각국 지도자들과 회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인 시절의 전쟁 범죄 책임론이 계속 제기되었고,[88] 기시 노부스케 당시 총리를 비판하다가 1959년 자민당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1961년 4월, 동남아시아 시찰 명목으로 출국한 뒤 라오스에서 실종되었다.[145][89] 그의 행방과 생사 여부에 대해서는 파테트라오에 의한 살해설, CIA 암살설, 중국 공산당 납치설 등[19][24][26] 무성한 추측만 남았다. 2000년대에 공개된 CIA 문서에 따르면 쓰지가 냉전 시기 CIA 정보원으로 활동했으며[17][18][19], 중국 공산당에 의해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19][24][26]

결국 쓰지는 1969년 법원에 의해 1968년 7월 20일 사망한 것으로 선고되었으며,[16] 그의 고향에는 동상이 세워졌다.

4. 1. 도피와 잠적

제18방면군 고급 참모로서 방콕에서 종전을 맞이한 쓰지는 8월 14일, 방면군 사령관 나카무라 아키토 중장에게 "국가 백년을 위해" 잠복할 것을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영국이 쓰지를 전범 혐의로 추궁할 것이 분명했기에, 일부 방면군 막료들은 이 결정에 불만을 표했지만 나카무라 사령관은 쓰지를 옹호하며 영국의 문의에 "쓰지는 패전의 책임을 느끼고 자살하기 위해 부대를 이탈했으며, 산속에서 혼자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허위로 설명했다.[83]

쓰지는 처음에는 자결을 각오했으나, "아시아 속에서 민족의 재건을 위해서는 오히려 살아남아 아시아에 녹아들어야 한다"[144]고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수 명의 청년 장교와 함께 '아오키 노리노부'라는 가명을 쓰며 일본인 승려로 변장하여 태국 내에 잠복했다. 전직 군인이 승려로 변장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영국군이 수색을 강화하자, 쓰지는 방콕에 있는 중화민국 대표부를 찾아가 중일 평화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1945년 11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비엔티안, 후에를 거쳐 하노이로 이동했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충칭으로 갔다.

한편, 1946년 9월 태국 국왕 라마 8세의 의문사에 대해, 수사에 참여했던 영국 작가 윌리엄 스티븐슨(William Stevenson)은 쓰지가 국왕 암살에 관여했다고 주장했다.[84] 하지만 쓰지의 자서전 《잠행 3천 리》에 따르면 그는 1945년에 이미 태국을 탈출했고, 라마 8세가 사망한 1946년 6월 9일에는 중국에 있었으므로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144] 라마 8세 죽음의 진상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연합국 소속이었던 국민당 정부에 의해 은닉되었으며, 국방부 근무자 신분까지 부여받았다. 이는 쓰지가 과거 장개석의 특무 기관인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의 수장 다이리(戴笠)의 가족을 도운 인연으로 국민당 정권이 쓰지에게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장개석 본인도 자신의 어머니가 병사했을 때 쓰지가 위령제를 지내준 것에 대해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144]

국공 내전국민당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쓰지는 중국에 머무르는 것에도 위협을 느끼고 1948년 상하이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귀국했다. 전범으로 기소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는 일본 내에서 잠적 생활을 시작했다. 전우회, 사찰, 우익 단체 등에 몸을 숨기거나 가명으로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는 등 전국을 전전했다. 이 시기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귀국 직후인 1948년 봄에는 사가현의 오기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고, 이후 전국 닛렌종 사찰을 떠돌았다. 1949년에는 와타나베 와타루와 고다마 요시오에게 몸을 의탁했다. 같은 해 여름부터 1950년 1월까지는 도쿄도 니시타마군 오쿠타마의 한 은신처에서 토비타 토잔의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이 6개월 동안 쓰지는 자신의 도피 생활을 기록한 《잠행 3천 리》(潜行三千里)를 집필했다.

1950년 6월, 전범 지정에서 해제되자 쓰지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144] 그가 쓴 《잠행 3천 리》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44][9]

이시카와현 가가시에 있는 쓰지 마사노부의 기념 동상

4. 2. 정계 진출

1948년 일본으로 귀국한 후 잠행했으나, 1950년 1월 전범 지정에서 해제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도피와 잠복 중의 기록인 『잠행 삼천리』(潜行三千里일본어)를 선데이 매일에 연재했고,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같은 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85] 동시에 출간한 『15 대 1』 역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쓰지는 이 시기 인세 수입 등으로 부유해졌다.

구 군인 그룹과의 연줄을 통해 반공 진영에 참여했으며, 저서를 계속 출판하여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지명도를 확립했다. 공직 추방령이 해제된 후인 1952년, 이시카와현 제1구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다.[15] 처음에는 자유당 소속이었으나 이후 자유민주당으로 옮겨 하토야마 이치로 파벌 내 이시바시파에 속했다. 쓰지가 이시바시파에 속한 것은 이시바시 단잔의 "오는 자 막지 않고, 가는 자 쫓지 않는다"는 파벌 운영 방침[86]과 전 상관 이소야 렌스케가 전시 중부터 이시바시와 친밀했으며, 그가 쓰지를 추천했을 가능성[87] 등이 이유로 거론된다.

이시바시 내각 시기에는 외국을 순방하며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 중국의 저우언라이,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등 각국 지도자들과 회담했다. 1955년에는 소련을 시찰 방문하여 게오르기 주코프와 비밀리에 회담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쓰지는 미국이 오가사와라 제도오키나와를 반환한다면 소련도 치시마 열도사할린을 반환할 것이라는 논의를 했으며, 니키타 흐루쇼프와 주코프 간의 권력 투쟁을 예상하기도 했다.[26]

정치 활동 중에도 군인 시절 싱가포르 화교 숙청 사건이나 바탄 죽음의 행진 등 잔혹 행위에 대한 책임론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전 상관들로부터 고발당하기도 했다.[88]

중의원 의원 4선 중이던 1959년, 당시 총리이던 기시 노부스케를 비판하다가 자유민주당에서 제명되었고 의원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 전국구 후보로 출마하여 3위로 당선되었다.[9]

4. 3. 실종

1961년 4월, 쓰지는 동남아시아 시찰을 명목으로 참의원에 40일간의 휴가를 신청하고, 4월 4일 공용 여권으로 일본을 출국했다.[145][89] 그는 북베트남에 들어가 호치민을 만나기를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146][90][91] 약 1개월로 예정되었던 휴가가 끝나고 5월 중순이 되어도 귀국하지 않자, 가족의 요청에 따라 외무성은 현지 공관에 조사를 지시했다. 쓰지는 1961년 4월 21일, 라오스 진출을 도왔던 구 일본군 병사와 현지군 장교에게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소식이 끊겼다.[147][92] 이후 조사 결과, 그가 불교 승려로 변장하고 홀로 라오스 북부의 단지평원(자르 평원)으로 향한 사실이 밝혀졌다.[145][89]

쓰지의 실종 경위와 행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쓰지가 라오스에서 실종된 지 9년이 지난 1970년 4월 13일, 《아사히 신문》은 쓰지의 통역을 맡았던 중국인 양광우(楊光宇)[152][100]의 증언을 보도했다.[151][99] 양광우에 따르면, 1961년 4월 쓰지는 파테트라오에게 붙잡혔고,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쓰지의 제안으로 당시 종군 카메라맨이었던 양광우가 통역을 맡게 되었다.[153][101] 6월경 쓰지는 양광우에게 보수를 줄 테니 비엔티안으로 탈출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양광우는 곧 군 명령으로 베이징으로 사진 연수를 떠났고, 1962년 3월 라오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쓰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154][102] 파테트라오 사령관과 병사들은 "쓰지는 도망갔다" 또는 "양이 베이징으로 간 지 한 달쯤 지나 사라졌다"고 말했다고 한다.[154][102] 양광우는 "변장한 것 때문에 스파이 혐의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몰래 처형된 것 같다"고 추측했다.[155][103] 라오스 현지 조사를 실시한 미키 코헤이(三木公平) 역시 쓰지가 승려복 차림과 군 경력 때문에 스파이로 의심받아 프랑스군 장교의 관여 하에 처형되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156][104]

한편, 2005년에서 2006년 사이에 기밀 해제된 CIA 문서에 따르면, 쓰지는 냉전 시기 CIA를 위해 활동한 정보원이었다.[17][18][19] 이 문서들은 쓰지를 핫토리 다쿠시로와 함께 "극도로 무책임"하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제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킬 인물"로 평가했다. CIA 자산으로서는 정치적 전문성과 정보 조작 능력 부족으로 가치가 낮게 평가되었다.[17][18][19] 또한 문서에는 핫토리가 1952년 요시다 시게루 총리 암살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쓰지가 사회당이 진짜 적이라며 그룹을 설득해 이를 막았다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정보의 출처가 불분명하고, 쓰지 자신이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흘린 정보일 가능성도 제기된다.[18][19][21][22][23]

CIA 파일은 쓰지가 하노이에서 비엔티안으로 돌아온 후 중국 공산당에 납치되어 윈난성에 억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쓰지를 이용해 미일 관계나 일본의 동남아시아 입지에 타격을 주려 했으며, 1962년 8월 8일 기준으로 쓰지가 생존해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는 1962년 5월 말 CIA에 전달된 쓰지 자필 추정 봉투의 필적 감정 결과(8월 24일 확인)에 근거한다.[19][24][26] 쓰지의 아들 츠지 토루가 홍콩에서 아버지를 구출하려 공작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26] 그러나 이후 쓰지의 소식은 다시 끊겼다.[19][24]

쓰지의 실종 문제는 1962년 5월 4일 참의원 의원 운영 위원회에서 논의되었다.[157][98] 그의 참의원 의석은 1965년 6월 임기 만료 시까지 유지되었다. 그 사이 소속 정당 변경이 있었으나 부재중 상태로 처리되었다. 1969년 6월 28일, 가족의 실종 선고 청구에 따라 도쿄 가정 법원은 1968년 7월 20일을 쓰지의 사망일로 선고했다. 1979년에는 고향 이시카와현 가가시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묘비는 다이토시의 노자키 관음 자안사에 건립되었다.[105]

5. 평가

쓰지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하며 극명하게 엇갈린다.[110] 한편으로는 말라야 작전 등에서 보여준 작전 입안 능력이나 상관에게 직언하는 강직함, 현장 중심주의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30][110][117][120] 다른 한편으로는 노몬한 사건, 포트모르즈비 작전, 과달카날 전투 등에서 나타난 독선적인 작전 지도와 정보 무시, 싱가포르 화교 숙청 사건 및 바탄 죽음의 행진과 같은 전쟁 범죄 연루 의혹, 그리고 책임 회피 및 전후 행적 등으로 인해 강한 비판을 받는다.[58][65][71][120][121][122]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5. 1. 긍정적 평가

자신의 의견을 상관에게도 거리낌 없이 큰 소리로 직언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이시하라 간지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하며, 그의 말을 들은 상대방은 그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는 특유의 기백과 분위기를 지녔다고 전해진다.[110]

평등주의에 철저하고 정의감이 강했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있다.

  • 1942년 7월, 포트모르즈비 작전 수행 중 트루크 섬에 방문했을 때[112], 제4함대 사령장관 이노우에 시게미 중장의 환대를 받았다. 해군 전용 요정에서 게이샤들을 보며 해군의 호의를 느꼈지만, "너무나도 최전선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정서였다"고 회상하며 당시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았다.[112] 또한 트루크 섬 해군 숙소의 화장실과 욕실이 콘크리트 구조인 것을 보고 "이 시멘트로 토치카를 만들었다면, 그렇게 비참한 패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12]
  • 같은 해 9월 하순[113], 과달카날 전투와 관련하여 트루크 섬에 정박 중이던 연합 함대 기함 야마토를 방문하여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을 만났다. 물자 통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산해진미가 차려진 식탁을 보고 불쾌감을 느껴 "해군은 사치스럽군요"라고 비꼬았으나,[114] 이것이 야마모토 장관의 배려임을 알게 된 후에는 자신의 속좁음을 부끄러워하며 "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114] 이 경험을 통해 야마모토의 태도와 일본 육군의 하극상 풍조를 비교하며 "막료에게 제멋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은 상관의 죄가 아닐까"라고 반성하기도 했다.[114]
  • 노몬한에서는 부상병을 버리고 후퇴하는 아군을 꾸짖고, 스스로 최전선으로 나아가 부상병을 업고 돌아왔다고 전해진다.[115] 또한 연대장 스미 신이치로가 최전선에서 맥주병(실제로는 물이 담겨 있었다고 함)을 들고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는 의분에 사로잡혀 계급을 무시하고 연대장을 호통쳤다고 한다.[116]


고급 참모임에도 불구하고 현장 시찰을 꺼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최전선까지 방문하여 현장의 병사들과 직접 대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소통 방식은 그가 만난 사람들에게 친근감과 신뢰를 얻는 데 기여했다.[117]

사람을 끌어들이는 개성과 강한 정의감, 그리고 군사 작전에서의 재능 등은 높이 평가받는 부분이다. 전쟁 중 말라야 작전에서는 신문 기자들을 상대로 홍보 역할도 담당했는데, 기자들은 쓰지가 거침없이 설명하는 작전 내용에 감탄하며 그를 "작전의 신"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30][119] 하타 이쿠히코 역시 작전 참모로서의 쓰지를 평가하며, 특히 말라야 작전에서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120]

이러한 면모들로 인해 쓰지와 직접 접촉했던 군인들이나 그의 고향 사람들 중에는 그의 군사적 공적이나 인품을 지지하고 존경하는 이들이 많았다.[129] 종전 후 30년 이상이 지난 1979년에는 그의 출신지인 가가시 야마나카 온천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기도 했다.

5. 2. 부정적 평가

2005년2006년에 기밀 해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건에 따르면, 쓰지 마사노부는 냉전 기간 동안 CIA를 위해 첩보원으로 활동했으나, 정치적 전문성과 정보 조작 능력이 부족하여 가치가 없는 자산으로 평가받았다.[17][18][19] 이 문서들은 쓰지를 핫토리 다쿠시로와 "뗄 수 없는 관계"로 묘사하며, 두 사람 모두 "극도로 무책임"하고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감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특히 쓰지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제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킬 사람"으로 묘사될 정도로 위험 인물로 간주되었다.[17][18][19]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역시 그를 "제3차 세계 대전까지 일으킬지도 모르는 남자"라고 평가하며 위험시했다.[123]

CIA 파일에는 핫토리 다쿠시로가 1952년 요시다 시게루 총리를 암살하고 하토야마 이치로를 총리로 세우려던 쿠데타 계획 정보도 포함되어 있다. 파일에 따르면 쓰지가 이 쿠데타를 막았는데, 그는 쿠데타 그룹에게 진짜 적은 요시다 같은 보수 세력이 아니라 사회당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CIA는 이 정보를 사후에 인지했으며, 신뢰할 수 없는 중국 정보원으로부터 얻은 것이라고 밝혔다. 와세다 대학의 아리마 테츠오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쓰지 자신이 실제보다 더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보이도록 중국 측에 흘린 허풍일 가능성을 제기한다.[159][160][18][19][21][22][23]

쓰지는 작전 수행 과정에서 독선적인 태도와 월권 행위, 책임 회피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노몬한 사건에서는 독단적인 작전 지도로 패배를 자초하고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했으며,[120] 보급을 무시한 포트 모레스비 작전 강행과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정보 무시 등은 잘못된 작전 지도로 수많은 인명 손실을 초래했다.[71][122] 특히 싱가포르 화교 숙청 사건과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는 직무 권한을 넘어선 명령으로 비인도적인 잔혹 행위를 주도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58][65][121] 전후에는 이러한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을 피해 도망 다녔다.

스기모리 히데는 쓰지가 새로운 부서에 부임하면 경리부에 가서 상관들의 자동차 사용 내역이나 요정 지불 내역을 조사하여 약점을 잡았고, 이 때문에 상관들이 그의 횡포를 묵인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118]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쓰지가 신문 기자들에게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육군 내 하극상 체질의 상징으로 간주했다.[30]

우치나다 투쟁 당시에는 현장에 나타나 시위대의 사기를 높였지만, 밤이 되자 추위를 핑계로 사람들을 돌려보낸 뒤 미군 고위 간부와 단독으로 회담했다. 다음 날 아침 미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이미 시작됐으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국회에서 투쟁하겠다"며 현장을 떠나 비판을 받았다.[125]

언론인 반도 가즈토시는 임팔 작전으로 악명 높은 무타구치 렌야와 쓰지를 비교하며, "무타구치는 적어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지만, 쓰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반도는 쓰지를 직접 만났을 때 "절대 악이 실존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고 술회했다.[126][127] 다만 쓰지의 차남 쓰지 다케시는 반도가 아버지를 단 한 번, 짧은 시간 만났을 뿐이라며 그의 평가에 반박했다.[128]

5. 3. 종합적 평가

쓰지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110] 사람을 끌어당기는 개성과 강한 정의감, 말라야 작전 등에서 보여준 군사 작전의 재능은 높이 평가받기도 했다. 전쟁 중 기자들은 쓰지를 "군의 신"이라 칭송했으며[30][119], 하타 이쿠히코는 작전 참모로서 쓰지의 말라야 작전과 바탄 반도 작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20] 그는 상관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110], 과달카날 전투 패배 시에는 스기야마 겐 참모총장에게 해군의 수송 실패를 강하게 지적하기도 했다.[111] 또한 평등주의와 정의감이 강한 면모도 보였다. 포트모르즈비 작전 중 트루크 제도의 해군 요정(요정 고마쓰) 환대를 "최전선의 모습과는 동떨어졌다"고 비판하고[112], 전함 야마토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환대를 받았을 때도 처음에는 "해군은 사치스럽군요"라고 비꼬기도 했다.[114] 곧바로 해군 측으로부터 야마모토 장관의 배려임을 알게 되자, 하급 관리의 마음으로 원수의 진의를 헤아리지 못했던 부끄러움에 "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상하며, 하극상 풍조에 대해 반성하기도 했다.[114] 노몬한 사건 당시 부상병을 직접 구출하거나, 최전선에서 물을 마시는 연대장을 질타한 일화도 전해진다.[115][116] 고급 참모임에도 최전선을 자주 방문하여 현장 인원들과 소통하며 신뢰를 얻기도 했다.[117]

그러나 그의 행동은 심각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싱가포르 화교 숙청 사건과 바탄 죽음의 행진 등 비인도적인 전쟁 범죄를 주도했다는 의혹과[58][65][121], 전후 도주하여 전범 재판을 회피한 점이 대표적이다.[58][65][121] 하타 이쿠히코는 노몬한 사건에서의 독단적인 행동과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비판했다.[120] 보급을 무시한 포트모르즈비 작전 강행과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정보 무시 및 무리한 공격 감행은 많은 인명 손실과 패배를 초래한 잘못된 작전 지도로 평가받는다.[71][122] 그의 독선적인 작전 수행, 월권 행위, 책임 회피는 여러 기록에서 지적된다. 스기모리 히데는 쓰지가 부임하면 경리부 자료를 통해 상관의 약점을 잡아 횡포를 부렸다고 증언했다.[118]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쓰지를 "자신의 공적 이야기"만 하는 인물로 평가하며, 육군하극상 체질의 상징으로 보았다.[30] 전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그를 "제3차 세계 대전까지 일으킬지도 모르는 남자"로 간주하며 위험 인물로 분류했다.[123] 우치나다 투쟁 당시 현장을 찾아 지지자들의 사기를 높였으나, 포격이 시작되자 "국회에서 투쟁을 계속하겠다"며 현장을 떠나 비판을 받기도 했다.[125] 작가 반도 가즈토시는 임팔 작전을 무리하게 추진한 무타구치 렌야와 비교하며, "무타구치는 자신의 책임을 말했지만, 쓰지는 자신의 책임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쓰지를 만났을 때 "절대 악"의 기색을 느꼈다고 술회했다.[126][127] (이에 대해 쓰지의 차남 쓰지 다케시는 반도가 아버지를 짧게 만났을 뿐이라며 반박했다.[128])

이처럼 극단적인 평가 속에서도 쓰지와 직접 접촉했던 군인들이나 그의 고향 이시카와현 가가시 야마나카 온천 지역 사람들을 중심으로는 그의 군사적 공적이나 인품을 지지하고 경애하는 이들이 많았다.[129] 1979년에는 그의 고향에 동상이 건립되기도 했다.

2005년 공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에는 쓰지의 전후 행적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아리마 테츠오에 따르면, 쓰지가 저술한 《잠행 3천 리》의 내용은 대체로 사실이며, 이는 중국 국민당의 보고서를 통해 교차 확인된다. 전후 쓰지는 잠시 탄광 광부 등으로 은신하다 1950년경부터 다시 활동을 재개하려 했으며, 이후 정계에 진출했다. CIA 문서에는 핫토리 다쿠시로 등이 연루된 요시다 시게루 정권 전복 쿠데타 계획에 대한 정보도 있으나, CIA 자체적으로도 정보의 신뢰성을 낮게 평가했으며("신뢰성을 판단할 수 없는 정보원으로부터의, 신빙성을 판단할 수 없는 정보"[159]), 아리마 테츠오는 쓰지가 연관된 일종의 블러프일 가능성을 제기했다.[160]

6. 관련 작품

제목출판사출판 연도
十五対一|15대 1일본어감등사1950년
1960年|1960년일본어동도서방1956년
ズバリ直言|단칼의 직언일본어동도서방1959년
世界の火薬庫をのぞく|세계의 화약고를 들여다보다일본어동도서방1957년
亜細亜の共感|아시아의 공감일본어아동서방1950년
自衛中立|자위중립일본어아동서방1952년
ガダルカナル|과달카날일본어양덕사1950년
この日本を|이 일본을일본어협동출판1953년
これでよいのか|이래도 되는가일본어유기서방1959년
シンガポール|싱가포르일본어동서남북사1952년
潜行三千里|잠행 3천 리일본어마이니치 신문1950년 (2008년 재간)
ノモンハン秘史|노몬한 비사일본어마이니치 완즈2009년 (가족에게 보냈던 수기를 공개)


  •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장편 만화 『무지개색 트로츠키』에서는 노몬한 사건을 계기로 쓰지가 -의 전면 전쟁을 꾀하며, 이 사건 전에 대소(對蘇) 전쟁 계획에 대해 쓰지와 스승인 이시하라 간지가 여러 모의를 거듭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 카와구치 카이지의 장편 만화 『지팡구』에서는 쓰지가 추크 제도를 방문하여 통수권을 방패 삼아 반강제적으로 연합함대 수뇌부의 승인을 얻은 후, 가공의 인물인 소가 타쿠미 해군 소령과 만나 일본의 패전과 60년 후의 전투함 '미라이'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작품 속에서 그는 대본영에 과달카날 섬 철수 명령을 진언하기로 결심하고, 역사적 사실보다 6개월 빠르게 과달카날 철수를 실현시킨다.
  • 『쇼와 천황 이야기』(昭和天皇物語일본어) (2017년부터 쇼가쿠칸의 『빅 코믹 오리지널』에서 연재 중인 작품. 작화: 노조 준이치, 원작: 반도 가즈토시의 昭和史|쇼와사일본어, 각본: 나가후쿠 카즈나리, 감수: 시바 히데우)에서도 등장한다.

참조

[1] 문서 Tsuji's birthyear is disputed. Several Japanese sources use 1903, but Tsuji himself wrote that it was 1901. Other sources state 1900 or 1902. The 1901 date is from David Bergamini's ''Japan's Imperial Conspiracy'', p. 981.
[2] 서적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 https://www.worldcat[...] Modern Library 2003
[3] 서적 Japan's Holocaust: History of Imperial Japan's Mass Murder and Rape During World War II Knox Press
[4] 서적 Japan's Holocaust: History of Imperial Japan's Mass Murder and Rape During World War II Knox Press
[5] 서적 Japan's Holocaust: History of Imperial Japan's Mass Murder and Rape During World War II Knox Press
[6] 웹사이트 Tsuji Masanobu (1901–1961?) http://pwencycl.kgbu[...] 201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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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웹사이트 Colonel Tsuji Masanobu of Malaya https://www.warbirdf[...] 202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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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웹사이트 The Causes of the Bataan Death March Revisited http://www.us-japand[...] 2021-08-09
[13] 서적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 https://www.worldcat[...] Modern Library 2003
[14] 서적 Nomonhan: Japan against Russia, 1939 https://www.worldcat[...]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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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적 Japan's Greatest Victory: Britain's Worst Defeat https://www.worldcat[...] Sarpedon 1997
[26] 문서 Harvnb|有馬|2010|pp=232-239
[27] 뉴스 堀内英子さん死去(故堀内光雄元通産相の妻) http://www.jiji.com/[...] 時事通信 2017-03-08
[28] 문서 週刊現代(2015.8.19)(「作戦の神様」辻政信の孫は富士急社長、児玉誉士夫の息子はTBS役員……あの戦争の有名人たちの子孫は「いま」)
[29] 문서 失踪扱いのため、任期満了まで参議院議員として在籍扱いとされている。
[30] 문서 高松宮日記4巻、206-207頁(1942年4月6日記事)
[31] 문서 싱ガポール華僑粛清事件、バターン死の行進。
[32] 서적 昭和陸海軍の失敗―彼らはなぜ国家を破滅の淵に追いやったのか 文藝春秋
[33] 서적 悪魔的作戦参謀辻政信 稀代の風雲児の罪と罰 光人社
[34] 문서 前田 啓介「第2章 炭焼きの子に生まれて」 https://www.audible.[...]
[35] 문서 Harvnb|秦|2005|p=|pp=103-104|loc=第1部 主要陸海軍人の履歴-陸軍-辻政信
[36] 서적 軍国太平記 中央公論
[37] 서적 二・二六事件―「昭和維新」の思想と行動 中央公論
[38] 서적 忘れ得ぬ満州国 経済往来社
[39] 문서 第三十七条 司令官権外ノ事ニ於テ已ムコトヲ得サル理由ナクシテ擅ニ軍隊ヲ進退シタルトキハ死刑又ハ無期若ハ七年以上ノ禁錮ニ処ス
[40] 서적 ノモンハン 元満州国外交官の証言 現代史出版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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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서적 ノモンハン戦争 モンゴルと満州国 岩波新書
[45] 간행물 捕虜 図書出版社 1978
[46] 문서 杉田, 1987, p=112。服部は、1940年(昭和15年)10月に参謀本部に戻り、作戦班長に任命された(同)。
[47] 문서 大西, 1977, pp=136-137。このため、第11軍司令部には苦情が殺到したとされる(同)。
[48] 문서 大西, 1977, pp=136-137。事件は不問に付されたが、山本は釈放が決まった日に自殺した(同)。
[49] 문서 同研究部の研究成果は「これだけ読めば戦は勝てる」(1941年)と題した小冊子にまとめられ、この冊子は太平洋戦争の開戦にあたり南方作戦のため南方各地へ向かう輸送船に乗船する将兵に配布された(防衛研, 1966, p=51-53)。
[50] 문서 杉田, 1987, p=146は、ノモンハン事件の後、左遷されていた辻の起用について、同年10月19日に参謀本部作戦課の作戦班長となった服部卓四郎との人的繋がりによることは疑いない、としている。
[51] 문서 杉田, 1987, p=196。着任は同月14日(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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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서적 十三階段を上る 亜東書房 1952-4-20
[56] 서적 最後の戦犯死刑囚 西村琢磨中将とある教誨師の記録 平凡社 201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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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서적 十三階段を上る 亜東書房
[63] 문서 杉森, 1982, p=133
[64] 서적 戦争犯罪 新人物往来社 1975-1-1
[65] 서적 日中和平工作 回想と証言 1937-1947 みすず書房
[66] 문서 トーランド (1970) 2巻「五部 失われた希望 3 バターンを埋める捕虜」「4 死の行進」241頁-256頁、347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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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문서 高松宮日記4巻、331-332頁(1942年7月28日記事)
[69] 문서 高松宮日記4巻、476-477頁(1942年8月28日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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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문서 辻中佐ノ話(十七、十一、二五)「ガダルカナル」島ノ皈リ40℃カラノ熱アリ。フラ〱トシテヤツト大発カラ駆逐艦ニ引キ上ゲラレテ士官室ニイツタラ、握リ飯ト塩鮭ガ一人分アツテ誰モ居ラナカツタガ、ソレヲ食ツタ時ノ甘サ。翌朝ノ朝食デごぼうノ煮付ガ出タガ、之ガ一ヶ月目ノ野菜。「ラボール」ニ皈ツテ「サシミ」ヲ食ツタ味ハ忘レラレズ。「トラツク」ニツイテ、夜爆撃ヲ音ヲ聞カズニフト目覚メタ未ダ爆撃ニ来ヌカト思ツタ。東京ニ来テ足ラヌ〱ト云フガ、之ハ段違ヒノモノガアルト感ジタ。/「ガ」島ハ餓島ナリト云フモノアリ。海軍設営隊トカ一木支隊ノ残員トカ銃モナニモナキモノ、「ジャングル」ニヒソミテ揚陸スル糧食ヲサラツテ行ク。之ヲケシカラヌトモ云ヘヌデハナイカ.(以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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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문서 高松宮日記5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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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서적 ラオスの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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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서적 ラオスの霧
[96] 서적 ラオスの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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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웹사이트 「議員辻政信君に関する件」]第40回国会 議院運営委員会 第21号 https://kokkai.ndl.g[...] 参議院 2020-08-01
[99] 서적 ラオスの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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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서적 ラオスの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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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문서 昭和期の国家主義者・右翼。戦前は[[愛国勤労党]]を立ち上げ[[神兵隊事件]]を起こし、戦後は[[全日本愛国者団体会議]]顧問を務めた
[109] 서적
[110] 서적
[111] 문서 ◎参謀総長「ガ」島作戦ニツキ奏上。海軍デ輸送ヲヨクヤラヌト云フ現地電報ニツイテ申上ゲタ。駆逐艦ヲ擱坐揚陸スルナント云フコトヲ申上ゲタラシク、侍従武官カラソンナ計画アリヤト聞イテキタ。現地電ハ十一日夜ノ駆逐艦ドラム缶輸送モ駆逐艦ガ遠クカラ周章トシテ投ゲ出シタノデ、一二〇〇缶中二五〇ヨリトレナカツタ等アリ。辻中佐ママ「カン〱」ニナツテルノデ、ソンナコトマデ奏上シタ。(以下略)
[112] 문서 "[[#ガダルカナル(辻1975)]]30-32頁"
[113] 문서 辻の回想では9月24日だが、実際は9月27日だったとも。
[114] 문서 "[[#ガダルカナル(辻1975)]]104-105頁"
[115] 서적
[116] 서적 辻政信『ノモンハン』
[117] 서적
[118] 서적
[119] 문서 ○新聞ニ馬来作戦ノ記事、辻作戦主任参謀ノ記スル処ト思ハレルモノ二頁ニワタリ出タリ。中ニ作戦主任ガ独リデ作戦ヲキリ廻ス、司令官等ハ「ロボット」ナリト云ハヌバカリノ書キ振リナリ。又海軍トノ協定ノ経過其ノ他作戦ノ決定ニ対スル過ギタル曝露的記事アリ。其ノ間誤解ノ因トナリ或ハ海軍ノ統率ヨリスレバ甚ダシ排斥セラルベキ思想アリ。軍ノ神様ト愛称セラルヽ辻中佐ニシテ記スル記事トスレバ、下剋上ヲ是認スル不純ナル統率ノ陸軍ニ於ケル病コウモウニ入ツテヰルトデモ云フベキカ。自分ノ手柄話デアリ、一般ノ人気取リデアル。之ヲ新聞ニ出ス陸軍報道部モ自分ノ人気トリデアル。(以下略)
[120] 서적 昭和史の軍人たち 文藝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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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서적 真実について 和光社
[126] 서적 ノモンハンの夏
[127] 서적 昭和陸海軍の失敗―彼らはなぜ国家を破滅の淵に追いやったのか 文藝春秋
[128] 서적 辻政信の真実 失踪60年 伝説の作戦参謀の謎を追う 小学館
[129] 서적 日本軍閥秘史 裁かれる日まで 中華國際新聞社
[130] 뉴스 堀内英子さん死去(故堀内光雄元通産相の妻) http://www.jiji.com/[...] 時事通信 2017-03-08
[131] 뉴스 デイリー新潮2017年6月1日 デイリー新潮 2017-06-01
[132] 서적 閨閥 立風書房
[133] 간행물 「元参謀「辻政信」が失踪直前に残した『未発表手記』 新潮社
[134] 서적 《잊을 수 없는 만주국》(忘れ得ぬ満州国) 경제왕래사(経済往来社)
[135] 서적 《노몬한: 전 만주국 외교관의 증언》(元満州国外交官の証言) 현대사출판사
[136] 간행물 〈지옥에서 온 사자, 쓰지 마사노부〉(地獄からの使者辻政信)
[137] 서적 《노몬한 사건: 몽골과 만주국》(ノモンハン事件 モンゴルと満州国) 이와나미 쇼텐|이와나미 신쇼
[138] 문서 야마구치 슈(山口修) 저, 《일본 기념 우표 이야기 전전 편》(日本記念切手物語戦前編), 일본우표수집출판(日本郵趣出版), 1985년.에 따르면, 실제로 일본 [[일본 체신성|체신성]](현재의 [[일본우편]])은 싱가포르 함락 기념 우표를 1942년 2월 16일에 발행했지만, 기원절(2월 11일)에 함락되기를 기대하고 준비중이었다고 한다.
[139] 서적 《참모 쓰지 마사노부》(参謀・辻政信)
[140] 문서 米軍投降者を一律に射殺すべしと
[141] 서적 과달카날 전기
[142] 서적 해상 호위전 1953
[143] 서적 과달카날 문춘문고
[144] 문서
[145] 서적 라오스의 안개
[146] 서적 라오스의 안개
[147] 서적 라오스의 안개
[148] 서적 라오스의 안개
[149] 서적 라오스의 안개
[150] 서적 라오스의 안개
[151] 서적 라오스의 안개
[152] 문서
[153] 서적 라오스의 안개
[154] 서적 라오스의 안개
[155] 웹인용 『”私は辻政信氏の通訳だった” ラオスの中国人が証言 パテト・ラオ 9年前、尋問に立会う』朝日新聞1970年4月13日 http://www.mekong.ne[...] 2013-06-10
[156] 서적 라오스의 안개
[157] 웹사이트 「議員辻政信君に関する件」 http://kokkai.ndl.go[...] 第040回国会 議院運営委員会 第21号1962年5月4日 2013-04-21
[158] 문서
[159] 문서
[160] 서적 대본영 참모는 전후 무엇과 싸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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